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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디자인의 선구자를 추모한다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91 작성일 2021.04.16
내용
- 고 봉상균창립회장님을 추모하며 -


이재언의 문화방담(放談)

지금이야 ‘디자인’은 삼척동자도 입에 달고 사는 일상용어가 됐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에서도 낯선 개념의 영역이었다. ‘도안’ 등의 지극히 협소한 개념으로 번역을 하여 쓰기는 했지만, 문화와 산업 그 자체로 이해하는 디자인의 개념은 희박했다. 물론 산업과 사회 및 생활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필수적 창조 영역이라는 원론적 이해는 있었지만, 과거 워낙 낙후된 문화적 인프라 속에서 디자인의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토록 요원하기만 했던 디자인 선진국, 이게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의 성취와 위상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초기의 개척자들이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선진국들 어깨너머로 배우고 익히며 초석을 단단히 쌓아 올린 결과이다. 우리의 개척자들은 모든 것이 열악한 상태였지만, 패기와 자신감으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선진국 문화를 배우고 수용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나 망설임을 갖지 않고 난관들을 저돌적으로 돌파해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문화유산에는 탁월한 디자인 감각들이 전승되고 있었으며, DNA상으로도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의 디자인 부국론에 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1세대 선구자가 있다. 바로 4년 전 86세를 일기로 타계한 ‘봉상균’이다. 지금은 세계적 영화감독 봉준호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 디자인사(史)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개척자로서, 그 공로로 ‘디자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기념비적 프론티어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우리 디자인이 단기간에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물론 재능과 감각 등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량이 효율적으로 발휘되도록 장려하는 ‘디자인 정책’과 ‘전략’이 있었다는 점이다. 봉상균은 바로 그 디자인 정책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던 사람이다. 그는 오늘의 ‘산업디자인 진흥원’ 전신인 ‘디자인포장센터’와 대학을 오가며, 우리의 디자인이 ‘산학협력’의 시스템 위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환경과 정책을 실무적으로 완성시켜나간 주역이다. 그의 연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풍부한 실무경험과 깊이 있는 이론을 겸비한 인재였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로서는 현장 경험, 특히 정책에까지 참여한 전문가가 흔치 않았으며, 지금도 이렇게 두루 경험을 쌓은 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봉상균 작가
 
그가 디자인 정책과 전략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융합’과 ‘혼합’이다. 오늘날 전가의 보도처럼 운위되는 개념이지만, 과거에는 하나의 전문 분야에서도 뭔가 신속히 채워야 하는 조급증이 강해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그는 일찍부터 융‧복합 디자인을 강조했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미시적 그래픽의 포장지 역할을 넘어 세계 내 다양한 요소들을 거시적으로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고도화된 문화창조 전략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화려한 등장으로 융‧복합의 패러다임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봉상균 디자인 전략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개념이니 그가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디자이너는 한정된 범주의 지식 가공자가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개념과 가치의 조율자다. 특정 분야의 장인이기보다는 여러 악기의 연주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지휘자와도 같은 개념을 그는 이미 갖추고 있었다. 남다른 식견과 통찰력으로 이러한 앞서가는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다채로운 경험들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후 1955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을 때 회화 전공이었다가 도중에 디자인 전공으로 전과를 한 이력이 있다. 특히 대학을 졸업 후 회사를 설립하여 디자인 경영과 현장 실무를 경험했을 뿐 아니라, 문화공보부 산하의 ‘국립영화제작소’에 근무하기도 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일찍부터 그는 디자인과 파인아트의 융합, 영화 및 미디어의 응용, 산업과 교육의 교환, 전통문화와 현대예술의 융합, 자연과 예술의 조화, 예술과 과학기술의 융합, 이러한 다양한 실무경험과 이론적 바탕을 여러 권의 저서로 집대성함으로써 이론적으로나 현장 실무면에서나 우리 디자인의 굳건한 지주 역할을 한 바 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그의 디자인 교육철학은 ‘발상의 자유로움과 개성의 존중’이다. 정책적 측면에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디자인 지원 정책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다. 그 자신이 회화, 일러스트레이션, 공공미술 벽화, 제품디자인, 광고디자인, 영화 등에 걸쳐 자유롭게 오간 경험에 기초하여 교육 현장에서도 다양한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적극 권장하였다. 수많은 제자들이 하나 같이 고인을 회고할 때 빼놓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한 자유로운 개성을 존중하는 철학은 자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 자녀들이 모두 패션디자인, 영문학, 영화 등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18년 제작된 기념화집에 실린 아들 봉준호의 부친에 대한 회고가 인상적이다. “아버지는 저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덕후’셨다.”


- 스카이데일리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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